잊혀진 대유행의 교훈
1957년 '아시아 독감' 팬데믹
1957년 2월, 중국 남부 귀주성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출현했다. H2N2로 명명된 이 바이러스는 조류 인플루엔자와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재조합된 새로운 변종이었다. 인류는 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불과 두 달 만에 바이러스는 싱가포르에 도달했고, 4월에는 홍콩을 강타했다. 1957년 여름, 미국 해안 도시들에서 첫 감염 사례가 보고되었다. 국제 여행이 오늘날만큼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는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두 차례의 파도, 서로 다른 희생자들
팬데믹은 두 차례의 큰 유행 파도로 진행되었다. 1957년 가을, 첫 번째 파도는 주로 학교 아동들을 강타했다.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다행히 어린이 사망률은 낮았다.
그러나 1958년 초 찾아온 두 번째 파도는 훨씬 치명적이었다. 임산부, 기저질환을 가진 노인층이 집중적으로 희생되었다. 미국에서만 7만~11만 6천 명이 사망했고, 영국에서는 1만 6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최소 11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항생제 시대의 역설
1957년 팬데믹은 '항생제 시대'에 발생한 첫 번째 대규모 인플루엔자 유행이었다.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가 의료계의 혁명으로 찬사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팬데믹은 항생제 시대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인플루엔자 자체보다 더 위험했던 것은 바이러스 감염 이후 발생하는 2차 세균성 폐렴이었다. 문제는 이미 세균들이 항생제에 내성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영국의 의료진들은 페니실린에 반응하지 않는 폐렴 사례들을 목격하며 경악했다. 항생제의 과도한 사용과 오남용이 낳은 결과였다.
백신 개발의 성공과 한계
1957년 팬데믹은 과학자들이 인플루엔자 팬데믹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연구한 첫 번째 사례였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속하게 바이러스 샘플을 동결건조하여 전 세계 실험실로 배송했다. 이는 국제 공중보건 협력의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과학자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백신을 개발했다. 이는 의학사의 중요한 성취였다. 그러나 백신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초기 백신 공급량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배송과 접종 체계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미국과 캐나다 모두 대규모 예방접종에 필요한 물류와 인프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 충격
보이지 않는 비용
1957년 팬데믹이 금융시장에 미친 영향은 흥미롭게도 제한적이었다. 1957년 7월 12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정점을 찍은 후 10월 22일까지 19.4% 하락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이 하락의 원인으로 독감 유행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1957년 8월부터 1958년 4월까지 지속된 경기 침체가 더 큰 요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역설적이게도 백신의 존재와 정부의 적극적 대응이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의 불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당시 미국은 학교 통합 문제와 냉전 긴장, 특히 10월 4일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가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0년의 진화, 그리고 소멸
1957년 출현한 H2N2 바이러스는 이후 10년간 인류와 함께 진화했다. 바이러스는 '항원 소변이(antigenic drift)'라는 과정을 통해 소규모 유전자 변형을 거듭하며 주기적으로 유행을 일으켰다.
그러나 1968년, H2N2는 갑자기 사라졌다. '항원 대변이(antigenic shift)'를 통해 새로운 H3N2 바이러스가 출현하면서 H2N2를 완전히 대체했다. 이 새로운 변종은 1968년 또 다른 팬데믹을 일으켰지만, 1957년보다는 덜 치명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약 7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국에서는 3만 4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의 1957년 팬데믹
한국에서도 1957년 아시아 독감은 큰 피해를 남겼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찾아온 이 팬데믹은 의료 인프라가 취약했던 당시 한국 사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정확한 국내 사망자 통계는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보건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감염되었고, 특히 도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전쟁 중 유입된 미군 의료진과 물자가 백신 확보에 일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신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국민은 자연 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잊혀진 팬데믹이 남긴 교훈
1957년 아시아 독감 팬데믹은 1918년 스페인 독감과 코로나19 사이에 끼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팬데믹이 남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제 협력의 중요성: WHO의 신속한 바이러스 샘플 공유는 국경을 넘는 공중보건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국제 감염병 감시 체계의 토대가 되었다.
백신 개발 속도와 배포 체계의 격차: 과학은 빠르게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이를 전 세계에 공평하게 배포하는 물류 체계는 훨씬 더디게 따라왔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반복되었다.
항생제 내성의 경고: 1957년 팬데믹은 항생제 내성 문제를 일찍 경고했다. 70년이 지난 지금, 항생제 내성은 WHO가 지정한 10대 공중보건 위협 중 하나다.
학교 폐쇄의 효과: 영국 연구진들이 1957년 팬데믹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학교 폐쇄가 감염 확산을 늦추는 데 효과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코로나19 대응에서도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팬데믹의 파도 패턴: 서로 다른 연령층을 공격하는 두 차례의 유행 파도는 팬데믹 대응이 장기전임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파도가 지나갔다고 안심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다음 팬데믹을 위한 준비
1957년 이후 세계는 1968년 홍콩 독감, 2009년 신종플루, 그리고 2019년 코로나19 등 여러 팬데믹을 경험했다. 매번 우리는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백신과 치료제의 불균등한 분배, 의료 체계의 과부하, 경제적 충격, 그리고 국제 협력의 어려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이한다. 조류, 돼지, 인간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과학자들은 다음 팬데믹이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라고 말한다.
1957년 팬데믹은 잊혀졌지만, 그 교훈은 잊혀서는 안 된다. 빠른 국제 협력, 충분한 백신 생산 능력, 공평한 배포 체계, 항생제의 현명한 사용, 그리고 무엇보다 팬데믹이 장기전임을 인정하는 사회적 준비—이 모든 것이 1957년이 우리에게 남긴 값비싼 교훈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110만 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1957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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