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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다’라는 말 뒤에 숨은 편견

‘머리가 좋다’라는 편견을 넘어, 몸 전체가 함께 생각하는 다양한 생명체의 지능을 탐구합니다.
‘머리가 좋다’라는 말 뒤에 숨은 편견

3억 년 침묵 끝에 드러난 ‘분산형 두뇌’의 설계도

'머리가 좋다'는 말이 놓치고 있는 것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

“이건 머리 쓰는 일이다.”

지능, 판단력, 계산 능력 같은 것들은 모두 머리라는 한 지점에 몰려 있다는 전제를 깔고 쓰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떠올릴 때도, 다른 동물을 떠올릴 때도,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머리 크기”나 “뇌의 발달 정도”를 기준 삼아 지능을 가늠합니다.

하지만 바다와 해변, 심해와 얕은 물을 함께 들여다보면, 이 전제는 생각보다 빨리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 행성에는

해파리처럼 뇌가 거의 보이지 않는 동물,

불가사리와 해삼처럼 머리다운 머리가 구분되지 않는 동물,

문어처럼 팔마다 별도의 ‘작은 두뇌’를 나눠 가진 동물이 공존합니다.

이 생명체들은 모두 주변을 감지하고, 위험을 피하고, 먹이를 찾고, 때로는 스스로 몸 일부를 버려가며 생존 전략을 실행합니다. 분명히 결정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익숙하게 찾는 ‘두뇌의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것은 머리가 없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머리를 몸 전체로 흩어 둔, 또 다른 방식의 두뇌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Digest는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표현 뒤에 숨어 있던 이런 편견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머리가 아닌, 몸 전체로 생각하는 동물들’을 따라가며, 지능과 두뇌를 바라보는 우리의 기본 도식을 어디까지 다시 써야 하는지 살펴보려는 시도입니다.


머리가 아닌, 몸 전체로 생각하는 동물들

지구에서 ‘지능’을 떠올리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머리를 먼저 떠올립니다. 인간의 대뇌피질, 돌고래의 큰 뇌, 까마귀와 앵무새의 영리한 머리. 지능은 언제나 머리라는 한 지점에 모여 있고, 그곳에서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 오랫동안 통용된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행성의 다른 구역, 특히 바다와 심해, 해변의 얕은 물에서는 전혀 다른 실험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생명체들은 거대한 머리를 갖지 않았고, 어떤 종은 아예 “머리다운 머리”조차 갖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은 신경과 결정을 몸 전체에 흩어놓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해파리의 뇌 없는 신경망, 불가사리와 해삼의 방사형 신경 구조, 문어의 팔마다 분산된 신경절. 이 존재들은 “머리 하나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인간의 직관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는 묵직한 공백이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결정’은 일어나고 있는데,
그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문명도, 문자도, 연구 노트도 남기지 않은 채,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해부 표본과 전기생리 실험, 그리고 이 생물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환경 조건뿐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조각난 증거들을 다시 엮어, “몸 전체가 두뇌인 동물들”이라는, 낯설지만 일관된 설계도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머리는 보이지 않는데, 행동은 분명한 존재들

뇌과학과 인공지능 연구는 지난 수십 년간 빠르게 발전했지만, 대부분의 모델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합니다. 지능은 중앙 처리 장치(CPU)처럼 한 곳에 모여 있고, 손발과 감각기관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출력 장치라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실제 관찰된 데이터는 이러한 전제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해파리는 명확한 뇌 없이도 유영, 포식, 회피 행동을 수행합니다.

불가사리는 팔 하나를 잃어도, 나머지 팔이 다시 움직이며 먹이를 찾아갑니다.

문어의 팔은 잘려 나간 뒤에도 한동안 주변 자극에 반응하며 물체를 움켜쥡니다.

이 동물들은 분명 정보를 감지하고, 환경에 반응하며,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게 찾으려 하는 ‘두뇌의 자리’를 확인하려 하면, 엔지니어가 설계도의 핵심 페이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결정적인 위치 정보가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몰랐었던 지적 공백에서 오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능은 머리에 있다”는 문장을 수없이 되뇌었지만, 이 존재들은 머리를 거부한 채, 몸 전체로 판단하고 반응하는 구조로 수억 년을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어디가 두뇌인가?”가 아니라,
“어떤 패턴이 나타날 때, 이 동물은 하나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면, 기록 대신 몸 자체가 남긴 설계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파리의 신경환 – 원형 회로가 만든 최소 두뇌

첫 번째 단서는 해파리입니다. 해파리는 교과서적으로 “뇌가 없다”고 소개되는 동물입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먹잇감이 닿으면 촉수를 오므리고,

독침 세포를 선택적으로 발사하며,

빛과 중력을 감지해 유영 방향을 조절합니다.

해부와 미세 해부 결과, 해파리 몸에는 ‘신경환(nerve ring)’과 방사형 신경망이 분포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두개골 안에 모인 덩어리형 뇌라기보다는, 몸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진 원형 회로망에 가깝습니다.

연구진은 신경환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절단하거나 약물로 기능을 억제한 뒤, 해파리가 여전히 규칙적인 수축–이완 운동과 방향 조절을 수행하는지 관찰했습니다.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신경환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해파리는 일정 수준의 유영 패턴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특정 구간을 크게 제거하면, 전체 움직임의 리듬과 방향성이 무너지며 조정 능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이 실험은 해파리의 ‘두뇌’가 특정 지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환 전체에 분산된 전기적 패턴이라는 해석을 지지합니다.

비유를 바꾸면, 이는 중앙 관제탑이라기보다 순환선 지하철 노선과 닮았습니다.

열차가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순환할 때,

도시 전체의 이동 흐름이 자연스럽게 조율되듯,

신경환을 따라 도는 전기 신호의 패턴 자체가 곧 “지금 나는 유영 중이다”라는 행동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묻던 “뇌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여기서 미묘하게 빗나갑니다. 어디 한 곳이 아니라, 원형 회로 전체의 상태가 곧 두뇌의 역할을 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사리의 팔 – 잘린 뒤에도 남는 의사결정

극피동물, 특히 불가사리와 해삼은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합니다. 해부학적으로 이들은 몸 중앙에 신경고리, 팔마다 방사형 신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경들은 감각 입력과 운동 출력을 직접 연결하는 방사형 고속도로처럼 팔 끝까지 이어집니다.

실험적으로, 불가사리의 팔 하나를 절단했을 때 나타나는 행동은 꽤 인상적입니다.

잘려 나간 팔이 한동안 빛과 접촉 자극에 반응하며,

방향을 바꾸고,

때로는 중심부를 향해 기어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는 팔이 단순한 ‘잘려 나간 살덩이’가 아니라, 여전히 나름의 입력–출력 회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방사형 신경은 중앙과의 연결이 끊겨도 국소적으로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위로 작동합니다.

생태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설계입니다.

불가사리는 포식자에게 공격을 받을 때 스스로 팔을 떨어뜨리는 자가 절단(autotomy)을 사용합니다.

이때 팔이 그대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움직이며 포식자의 주의를 끌면,

    • 중앙부는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즉, 잘려 나간 팔이 “중앙을 위해 시간을 버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미끼”가 되는 셈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익숙한 피라미드형 지휘 체계와 다릅니다.

한 번에 모든 정보와 명령이 머리에서 내려오는 구조가 아니라,

각 팔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산 조직에 가깝습니다.

“머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상식은, 불가사리의 잘린 팔 앞에서 설득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문어의 팔 – 중앙 서버와 엣지 컴퓨팅 사이

문어는 이 이야기의 스케일을 한층 더 키우는 사례입니다. 문어는 심장 3개와 함께, 뇌 9개를 가진 동물로도 자주 소개됩니다.

  • 몸 중앙에 위치한 주 뇌 1개,
  • 여덟 개 팔에 분포한 보조 신경절(‘팔의 뇌’) 8개.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문어의 뉴런 중 약 60%가 팔 쪽에 분포합니다. 팔은 촉각·화학 감지·운동 조절을 한 덩어리로 처리하는, 사실상 “지역 지능 유닛”입니다.

행동 연구를 보면 이 특징은 더 분명해집니다.

  • 팔은 주변의 질감, 온도, 화학 신호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 물체를 집거나 비틀 때, 섬세한 힘 조절을 스스로 수행합니다.
  • 중앙 뇌가 일일이 모든 관절 각도를 제어하기보다는,
    • 대략적인 목표(“저기 있는 조개를 가져와”)만 제시하고,
    • 팔이 현장에서 세부적인 경로와 힘 배분을 알아서 계산하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부 연구자는 “중앙 서버 + 엣지 컴퓨팅”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 중앙 뇌: 큰 전략과 전반적 방향을 설정하는 서버,
  • 팔의 신경절: 로컬 데이터를 바탕으로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는 엣지 장치.

중앙이 없으면 전체 계획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말단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어의 팔이 보여 주는 유연한 조작과 환경 대응은 불가능해집니다.

정리하면, 문어의 몸은 중앙집권형 조정 + 말단 자율 처리를 함께 사용하는 복합 네트워크 시스템입니다. 지능을 머리 하나의 능력으로만 보는 관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언제 ‘분산형 두뇌’가 유리해지는가

해파리, 불가사리, 문어의 팔까지 살펴보면, 이들 사이에는 공통된 설계 원리가 떠오릅니다.

“지능은 반드시 한 곳에 모여 있을 필요가 없다.
어떤 환경에서는, 여러 곳에 흩뿌려진 작은 판단들이 모여 하나의 행동을 만든다.”

이 원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강점을 발휘합니다.

부분 상실 위험이 높은 환경

    • 포식자에게 일부를 잃더라도, 나머지 조직이 기능을 유지해야 할 때,
    • 분산형 신경계는 “잘려 나간 뒤에도 살아남는 기능”을 제공합니다.
    •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그 팔은 움직이며 포식자를 붙들고, 중앙은 그 사이에 도주할 수 있습니다.

정보가 말단에 밀집된 몸 구조

    • 촉수 끝, 팔 말단, 몸 가장자리 등, 말단에서 감지해야 할 정보가 많은 동물에게,
    • 모든 신호를 중앙으로 올렸다 내리는 방식은 시간과 에너지 비용이 큽니다.
    • 현장에서 감지–판단–반응을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더 효율적입니다.

방사형·다지형으로 뻗은 신체 형태

    • 팔과 촉수가 여러 방향으로 길게 뻗은 구조에서는,
    • 중앙에서 모든 것을 제어할 경우 지연 시간과 제어 복잡성이 크게 늘어납니다.
    • 이때 “팔에서 생각하는 설계”는 지연을 최소화하는 실용적인 해법이 됩니다.

인간의 뇌는 두개골 안에 촘촘히 모여 있는, 전형적인 중앙집권형 설계입니다. 반대로 바다와 해변의 이 존재들은 환경과 몸 구조에 맞추어 “네트워크형 지능”이라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교과서 속 한 문장을 다시 적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뇌가 있어야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은 때로, 몸 전체에 흩어져 있다.”

다시 보는 ‘머리가 좋다’는 말

이제 해파리, 불가사리, 문어를 한 번 지나쳐 본 뒤에 “머리가 좋다”는 말을 떠올려 보면, 이 표현이 실제 삶을 얼마나 좁게 잘라 쓰고 있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도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나는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 “이 일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에게 맞는 일이다.”

하지만 하루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하는 많은 선택은 애초에 ‘머리 하나’의 연산 결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 버스에 올라타기 전, 발이 먼저 멈추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
  • 오래 앉아 있던 의자를 떠나야겠다고 결정할 때, 허리와 어깨의 묵직함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순간.
  • 손끝의 감각만으로 스마트폰 화면에서 비밀번호를 찾고, 뜨거운 컵의 온도를 가늠해 거리를 조절하는 동작들.

이 모든 장면에서, 머리는 “이미 몸이 내린 판단을 나중에 언어로 정리해 주는 역할”에 가까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손, 허리, 심박, 장기에서 올라오는 신호들이 먼저 결정을 끌어당기고, 머리는 그 결과를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요약합니다.

연구자들이 바다 생물의 분산형 신경계를 해석하며 던진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의 경험에도 이어집니다.

“어디가 두뇌인가?”라는 질문 대신,
“언제, 어떤 조건이 모였을 때 ‘결정이 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회의실 책상 앞에서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도 결정을 미루다가, 집에 돌아와 소파에 기대 앉은 뒤에야 “아, 그 답이 맞겠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머리의 논리는 유보 상태였지만, 몸은 이미 하루 종일 “이 선택이 덜 소모적이다”, “이 방향이 덜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다”는 말은, 조금 다르게 옮겨 적을 여지가 생깁니다.

  • 어떤 이는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수행하는 중앙집권형 두뇌에 가깝고,
  • 또 어떤 이는 손과 눈, 귀와 장기에서 오는 신호를 미세하게 조율하는 분산형 감각–결정 시스템에 더 가깝습니다.

둘 중 하나만 ‘똑똑함’이라 부를 이유는 없습니다.

해변에서 해파리를 피하고, 수조 속 불가사리를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도 다시 보입니다.

저것은 머리가 없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머리를 몸 전체로 나눠 가진, 오래된 또 하나의 설계도입니다.

그리고 이 설계도는, “생각은 머리에서만 일어난다”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을 조용히 수정하도록 요구합니다.

오늘 하루 몸이 먼저 알아챈 피로, 꺼림칙함, 혹은 편안함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고쳐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머리가 다가 아니었다.
내 몸 전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흥미로우셨다면, 독자님의 시간과 호기심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더 치밀하고, 더 유익한 이야기를 준비하겠습니다. 바다의 오래된 실험실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지나치는 패턴이든, 한 편 한 편이 독자님의 ‘생각의 지형’을 넓혀주는 글이 되도록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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