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패권, 반도체·AI 인프라 전쟁
한국 일자리 지형 조용히 재편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관세와 수출입 규제를 중심으로 한 1라운드를 지나,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인프라를 둘러싼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국경선은 그대로지만,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 센터, 연구소와 서버룸이 어느 나라에 쌓이느냐에 따라 일자리와 소득, 기술의 무게중심이 조용히 이동하는 구조 변화가 진행 중이다. 한국 노동시장 역시 이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세 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공장’ 전쟁으로
1라운드에 벌어진 결투는 비교적 분명했다.
미·중 양국은 “고율 관세 부과”, “보복 관세”, “수출길 봉쇄”와 같은 헤드라인으로 대표되는 관세 전쟁을 벌였다. 수출입 상품과 통관이 주된 쟁점이었다.
2라운드에서 초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갔다. 핵심 키워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 반도체: 고성능 AI 칩, 메모리, 전력 반도체를 둘러싼 공급망 재편
- AI 인프라: 초대형 데이터 센터, 클라우드 리전, 슈퍼컴퓨터 구축
- 데이터와 규칙: 어떤 국가의 규제 체계 아래 어떤 데이터가 축적될 것인가
국경선이 바뀌지 않더라도, “어느 나라에 설비와 데이터가 축적되는가”에 따라 장기적으로 일자리와 임금, 기업 투자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은 이 조용한 재배치를 뒤따라 움직인다.
미국·중국의 상반된 전략, ‘중간 지대’에 선 한국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AI 클라우드를 동맹권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첫째, 고성능 AI 칩과 이를 생산하는 핵심 장비의 대중 수출을 제한하는 규제를 잇달아 도입했다.
둘째, 자국과 동맹국 내 신규 반도체 공장 설립을 조건으로 세제 혜택과 대규모 보조금을 제시해 글로벌 기업들을 유인하고 있다.
여기에 초대형 데이터 센터와 AI 클러스터 역시 미국·유럽·일본 등 규범을 공유하는 국가에 우선 배치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은 반대로 “밖에서 못 가져오면 안에서 키운다”는 전략을 택했다.
자체 반도체 설계·제조 역량 강화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는 한편, 거대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자국 클라우드·AI 플랫폼을 육성한다. 데이터의 국외 반출을 강하게 통제하는 대신, 자국 내에서는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방향이다.
한국·대만·일본은 이 둘 사이, 이른바 ‘중간 지대’에 서 있다.
미국과는 군사·외교 동맹 관계지만, 반도체 장비·소재·부품, 완제품 수요, 인력·설비 이동 경로는 중국과도 깊이 얽혀 있다.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 구조 덕분에 기회와 선택 압박이 동시에 존재하는 위치다. 어느 규칙과 생태계에 더 깊이 연결될지에 따라, 장기적으로 공장과 데이터 센터, 연구소의 입지가 달라지고, 그에 연결된 일자리와 지역경제의 무게도 옮겨가게 된다.
제조·연구·지역경제, 세 갈래에서 나타나는 노동시장 변화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지점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세 갈래의 변화다.
제조·공정·설비 직군, 사무·연구·데이터 직군, 그리고 2·3차 협력업체와 지역경제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① 제조·공정·설비 직군…“라인이 어디에 깔리느냐”
반도체 제조 현장의 핵심 인력은 결국 “라인이 어디에 깔리느냐”에 따라 움직인다.
웨이퍼가 깔리는 클린룸, 공정을 돌리는 장비, 이를 유지·보수하는 엔지니어와 설비 인력은 공장 설립 지역과 함께 이동하거나 재배치된다.
미국이 보조금을 앞세워 반도체 공장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고, 한국 기업이 미국 현지 제조시설을 확대할 경우 다음과 같은 변화가 예상된다.
- 설계·세팅 단계에서 한국 숙련 인력이 일정 기간 파견되거나,
- 장기적으로는 공장 주변에 현지 인력과 협력업체 생태계가 새로 형성된다.
이 과정은 한국 국내 노동시장에 두 가지 상반된 효과를 동시에 낳을 수 있다.
- 일부 인력은 해외 법인 또는 장기 파견 기회를 얻지만,
- 국내에서는 최첨단 공정과 성숙 공정 간 격차가 커지며 **라인 간 ‘온도차’**가 확대될 수 있다.
관련 업계에 몸담았거나 여전히 연결고리를 가진 50~60대에게는 다음 질문이 중요해진다.
“내가 속한 산업의 주요 공장과 설비는 앞으로 어느 나라에 더 많이 깔릴 것인가.”
이 대답에 따라 퇴직 후 어떤 기업·산업과 자문·프로젝트 계약을 맺을지, 어떤 지역과 산업을 중심으로 ‘2막 커리어’를 설계할지의 방향이 갈릴 수 있다.
② 사무·연구·데이터 직군…“연구소와 데이터 센터가 어디에 쌓이느냐”
두 번째 축은 연구·개발·데이터·전략 등 사무·전문직이다.
반도체와 AI 인프라는 공장뿐 아니라, 그 주변에 연구소·테스트베드·데이터 센터를 동반한다. 초대형 AI 모델 학습을 위한 데이터 센터가 어느 나라에 집중되느냐에 따라, 그곳에 데이터 과학자, 엔지니어, 정책·윤리 전문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몰린다.
한국이 미·중 어느 생태계와 더 깊이 연결되느냐에 따라, 젊은 인재들이 어떤 규제·표준을 전제로 커리어를 쌓는지도 갈라진다.
50~60대 입장에서는 두 가지 관점이 중요해진다.
- 자신이 속한 대기업·공공기관·연구소가 어느 쪽 규제·표준에 더 강하게 묶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
- 그에 따라 향후 어떤 유형의 프로젝트와 예산이 늘어날지, 따라서 어떤 역량을 끝까지 업그레이드해야 할지 가늠하는 일이다.
자녀 세대에게도 지형 변화는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제적으로 통용될 가능성이 큰 수학·알고리즘·통계·언어능력과 같은 기초 역량과, 특정 국가의 안보·규제에 강하게 묶이는 기술·직무를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후자의 경우 해당 블록 안에서는 기회가 크지만, 그 밖으로 이동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③ 2·3차 협력업체·지역경제…“한 공장의 이동이 남기는 긴 그림자”
세 번째 축은 중소 협력업체와 지역경제다.
대형 반도체 공장 하나에는 수십~수백 개의 협력업체가 연결되어 있고, 공장 근로자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식당·카페·학원·부동산 시장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미·중 경쟁의 향방에 따라
- 대규모 증설이 국내에서 이뤄질 경우 해당 지역은 장기간 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지만,
- 설비와 투자가 해외 거점으로 쏠리면, 다른 지역은 장기적인 수요 감소와 함께 “조용한 쇠퇴” 압력을 받을 수 있다.
50~60대에게 이 축은 은퇴 후 정착지, 자녀·손주의 교육·일자리 기회가 열리는 지역, 지역 기반 자영업·부동산·투자 판단과 직접 연결된다. 같은 국가 안에서도 지역마다 성장과 노후화의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경제가 미·중 기술 경쟁 2막의 파도와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으로 뉴스를 읽는 기준…
“공장·연구소·데이터 센터의 지도를 바꾸는가”
미·중 기술 패권 경쟁 2라운드를 다루는 뉴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헤드라인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독자가 이러한 뉴스를 접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 문장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뉴스는 어느 나라에 공장·연구소·데이터 센터가 깔리는지를 바꾸는가.
그렇다면, 그 자리에 연결된 일자리와 지역경제의 무게도 함께 이동할 것이다.”
50~60대에게는 자신이 속했던 산업과 지역이 이 지도 위 어디에 위치하는지 다시 그려보는 작업이, 자녀 세대에게는 어느 생태계와 연결된 커리어를 설계할지 판단하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세계는 지금”이라는 거대한 문장을, 각 세대의 현실적인 선택지로 번역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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